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노블레스 오블리주 (문단 편집) === 영국 왕실 === 일반적으로 영국 왕실과 귀족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대표적인 모범을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물론 그렇게 '''이미지메이킹'''하는 측면도 있다. 여론이 호의적이지 못하고 국민들의 지지가 없으면 왕실이 유지되기 힘들기 때문.] 특히 전시에 귀족들이 자원하는 모습으로 많이 나타나는데, 아예 왕실 내부 규율에 왕실과 왕실에 속한 귀족들은 죄다 자체적으로 '''징병검사 후에 예외 없이 장교로 군대에 징집을 시키기로 규정되어있다.'''[* 상대적으로 안전한 직책으로 배정받았다고 까는 사람도 있지만, 전시에 전방이라면 장교든 보병이든 다 위험하다. 심지어 첫 전투에서 사망률이 제일 높은 계급이 바로 초임 소위라는 통계도 있다. 또 어느 나라든 장교가 복무기간이 더 길기 때문에 까일 정도는 아닌 듯. 무엇보다도 최하 직책에 있는 병사로 입대하면 그 위에 있는 사람들이 가시방석일 것이다.][* [[제1차 세계대전|1차대전]] 당시에는 [[영국군]] 경우 중, 소위 등 초급 장교 사망률이 제일 높았다.] 이 의무는 여성도 예외가 아니다. 귀족 자제들이 주로 가는 영국 최고 명문사학인 [[퍼블릭 스쿨]] 중 하나인 [[이튼 칼리지]] 출신으로만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5,619명이 참전해 1,157명이 전사했고 [[제2차 세계 대전]]에서는 4,690명이 참전해서 748명이 전사했다.[[http://www.etoncollege.com/ArmedServices.aspx|#]][* 이튼 칼리지 방문 중 이 일화를 들은 [[파스퇴르유업]] 설립자 [[최명재]]가 감명 받아서 세운 학교가 바로 [[민족사관고등학교]]다.] 이는 유서 깊은 명문 대학교들도 마찬가지였는데, 일례로 [[케임브리지 대학교]]도 1차 대전에 13,878명의 학생/교직원이 참전하여 2,470명이 사망했다. 전쟁 동안 대학의 운영은 거의 마비됐으며, 재정 상태가 안 좋아지자 1919년 [[공립대학]]으로 전환됐다. 오죽하면 대영제국의 몰락의 원인 중 하나가 이렇게 엘리트 계층이 원체 많이 죽어서라거나, 전후 작위 수여가 다른 시기보다 많았던 것이 이때 '''대가 끊긴''' 귀족 집안이 너무 많아서[* 영화 [[킹스맨 시리즈]]에 나오는 단체 킹스맨이 이렇게 대가 끊긴 집안의 돈이 모여 만들어졌다는 설정이다.] 그 벌충용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올 정도. 해군사관학교 출신[* 영국은 사관학교의 체제가 정규 4년제 대학인 한국이나 미국의 사관학교와는 좀 다르다. 최소 요구 학력이 고졸이며, 교육 기간은 10개월이다. 즉 생도 과정이 아니라 후보생 과정이며, 그렇다고 학사 학위를 요구하지도 않는다. 입학 조건에서 필수는 아니지만 대개의 생도들이 정규 학사 학위를 취득한 후에 들어오고, 복무 중인 현역병들도 꽤 들어온다.]으로 장교 출신인 [[찰스 3세]][* [[찰스 3세/결혼생활과 개인적 인품|불륜]]으로 대차게 원성을 사서 그렇지 사실 찰스도 군대도 갔다오고 자선 활동도 활발히 하는 등 왕족으로서의 다른 면모는 흠 잡을 데가 딱히 없다.]와 그의 동생인 요크 공작 [[앤드루 왕자]]는 [[포클랜드 전쟁]] 당시 헬리콥터 파일럿으로 참전했으며[* 당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승인을 요청하는 [[마거릿 대처]] 총리를 굉장히 불편하게 생각하며 승인을 했다고 한다.], 찰스 3세의 아들인 [[윌리엄 왕세자]]도 [[영국육군사관학교|육사]]를 나와 [[육해공]]을 모두 순시하고 공군 헬기 조종사로 복무하다가 엘리자베스 2세가 왕실 전속 부관으로 불러들었으며, 말썽 피우고 다니는 [[해리 왕자]]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에 장교로 참전했다. 물론 호위 병력으로 [[SAS(특수부대)|SAS]]가 줄줄이 따라다녔지만, 국방부는 '''"부대원들이 테러리스트들의 표적이 될 수 있으므로 본국으로 돌려보내기로 결정했다"'''고 발표[* 사실 영국 언론들은 왕자의 안전이나 부대원들을 위해서 이를 보도하지 않았지만 미국 언론에서 보도해버렸다고. --[[사이먼 "고스트" 라일리|염병할 양키 놈들. 그놈들은 우리 편인 줄 알았는데!]]--]했다고 한다. 군 복무를 위해 훈련을 받던 왕자들은 "아 내가 옛날에 그 왕자를 발로 뻥뻥 차고 다녔지!"라고 말하고 싶었던 선임들 때문에 하나같이 괴롭힘을 당했다고 한다. 일례로 해군사관학교 교장이 지나가다 한쪽 구석에서 생도였던 왕자가 훌쩍거리길래 왜 우냐고 물어보니까 ''''선임들한테 [[갈굼]]당해서''''라고 대답했다는 카더라도 있다. 실제로 해군사관학교에 재학했던 [[에드워드 8세]]는 '''[[찰스 1세]]의 사형장면을 재현하기 위해서 동급생들이 창문 틀에 목을 걸어놨고''', [[조지 6세]]는 내성적인 성격으로 선배와 동기들의 괴롭힘이 심해 [[말더듬]] 증상이 심해졌다. [[해먹]]에 묶여있어서 [[지나가던]] 교관이 구해줬다고 한다. ||{{{#!wiki style="margin: -6px -10px" [[파일:attachment/Queen_Elizabeth_II_WW2.jpg|width=100%]]}}}|| [[엘리자베스 2세]]가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차량 정비 장교''' 보직[* 하지만 실제 보직은 영국군 명예사단장이었다.]으로 돌아다닌 건 꽤 유명하다. 그런데 엘리자베스 여왕은 1926년생으로 [[나치 독일]]의 영국 공격이 한창이던 1941년에는 겨우 15세였다. --[[소년병]]? 아니 소녀 장교?-- 당연히 실질적으로 참전했다기보다는 전시에 왕실도 대중들과 함께 고통 분담을 한다는 상징적인 의미로 봐야 한다. 게다가 영국의 귀족들은 봉건제하에서 귀족들에게 부과된 병력 동원의 의무가 완전히 사라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나폴레옹]] 전쟁 시기에 [[윌리엄 피트(1759)|소(小) 윌리엄 피트]]가 추진한 세제 개편을 별 다른 저항 없이 받아들였다. 바로 '''귀족들이 가진 부동산에서 발생한 소득에 대해 부과하는 소득세'''. [[프랑스 혁명]]의 원인 중 하나가 토지 보유를 대가로 부과된 병력 동원의 의무가 사라진 귀족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려는 시도가 좌절되면서 악화된 프랑스 정부의 재정 상태였고, 아시아 대륙의 귀족들이 하나같이 보유한 재산에 대해서 과세받는 것을 격렬하게 저항했다는 점에서[* 일례로는 [[흥선대원군]]이 양반들에게 세금을 걷기 위해서 어떤 반발을 감수했는지 생각해 보면 된다.] 영국 귀족들은 엄청난 결단을 한 것. 다만 영국 귀족들이 정말 백성을 끔찍히 아껴서 이를 실천했다기보다는 프랑스 혁명 비슷한 민중 혁명을 예방하거나, [[나폴레옹]]의 유럽 제패 등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의 양보라고 봐야 타당하다.[* 그런데 그마저도 부담하기 싫어서 나라 말아먹은 경우도 적지 않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쨌든 대단한 것이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이라고 마냥 폄하할 일은 아니다.] 고인이 된 영국의 [[다이애나 왕세자비]]는 [[지뢰]] 제거 운동 등 반전 운동에 앞장서면서 전세계를 돌아다녔다. 이 점 때문에 그녀의 죽음이 [[죽음의 상인]]이라고 불리는 무기 상인들의 테러라는 [[음모론]]이 나오기도 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